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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천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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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읍

아름다운 문화터전 별의도시 Star영천!
깨끗한 시정, 잘사는 영천을 소개합니다.

관정리

지정(芝亭)과 관지(官旨)가 합해서 된 마을이다. 약 350여년전 벽진 이씨(碧珍 李氏)로 벼슬은 주부(主簿)이신 이수인(李守認)이라는 선비가 지정리(芝亭里)를 개척하여 마을을 만들어 원래는 지정리라 불리었다. 그런데 일설에는 池氏가 정자를 짓고 부터이고 또는 땅이 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300여년전에 월성 이씨(月城 李氏)가 관지리(官芝里)를 개척했다고도 하며 거여면의 소재지로 관청에 종사하는 선비가 많이 거주하였다 한다. 월성 최씨 및 월성 이씨가 많이 산다.이 마을 근처에 당나무 거리가 있다. 해 묵은 큰 당나무 밑의 녹음을 옛 조상들께서는 휴식처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는 사라져 버리고 흔적만 남아 있다. 관지(官芝)에는 서편에 붉은 색깔의 흙이 나온다. 옹기를 구웠던 곳으로 지금도 간혹 토기들이 나온다. 현재 이 마을 앞에 기차역이 생겨서 편리하다.

교대리

지정(芝亭)과 관지(官旨)가 합해서 된 마을이다. 약 350여년전 벽진 이씨(碧珍 李氏)로 벼슬은 주부(主簿)이신 이수인(李守認)이라는 선비가 지정리(芝亭里)를 개척하여 마을을 만들어 원래는 지정리라 불리었다. 그런데 일설에는 池氏가 정자를 짓고 부터이고 또는 땅이 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300여년전에 월성 이씨(月城 李氏)가 관지리(官芝里)를 개척했다고도 하며 거여면의 소재지로 관청에 종사하는 선비가 많이 거주하였다 한다. 월성 최씨 및 월성 이씨가 많이 산다.이 마을 근처에 당나무 거리가 있다. 해 묵은 큰 당나무 밑의 녹음을 옛 조상들께서는 휴식처로 이용하였을 것이다. 지금은 나무는 사라져 버리고 흔적만 남아 있다. 관지(官芝)에는 서편에 붉은 색깔의 흙이 나온다. 옹기를 구웠던 곳으로 지금도 간혹 토기들이 나온다. 현재 이 마을 앞에 기차역이 생겨서 편리하다.교대는 용교(龍橋)와 용대(龍垈)로 된 마을이다. 인기리(仁基里)는 하천이 흐르고 있다. 월성 이씨가 최초로 개척 하여 바르고 어진사람들이 많이 출생하라고 인기라 했다. 용대는 약 280년전에 황윤신(黃允信)이라는 선비가 우연히 이곳을 지나가다가 지형을 살펴보니 용이 누워 있는 형상이라 하여 이 자리에 마을을 형성하면 만석꾼이 날 자리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그 후 영천 최씨가 개척하여 이 곳에 줄곧 살고 있다. 갈포(葛蒲) : 약100년 전에 이곳에 중보(中洑)가 있었으나 집이 들어섬에 따라 교대 2리에 속해서 금호시장이 되어 버렸다.

구암리

구복(龜伏)과 가암(佳岩)으로 된 마을이다. 가암(佳岩)은 9개의 바위가 아름답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는데 구암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구암지에서는 수령이 약 200년 정도 되는 큰 버드나무 1그루가 있다. 구암(龜岩)은 구암(九岩)이라고 하는데 9개의 바위중에서 한개가 거북의 모습처럼 생겼기에 龜자를 넣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 一說에 의하면 약300여년전에 평산 신씨(平山 申氏)가 이 마을에 와서 참나무 숲을 제거하고 마을을 개척했다고도 한다.

남성리

약 400년전에 파평 윤씨(坡平 尹氏)가 정착하면서 마을 입구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것의 모양이 달모양이라 해서 남성(南星)달이라 했다. 남성달이는 남성리에서 가장 큰 마을이며 현재 약 30여 가구가 살고 있다. 마을 앞 정상에 큰 바위가 있다. 녹은방(錄隱坊) : 남성 서쪽에 있으며 현재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남서로 큰 산이 뻗어 있고 그리고 전면이 깎아 세운 절벽이며 마을의 터가 그 옛날 강물이 흘러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또 수풀이 쌓여있는 산골짜기에 가느다란 길이 옛날부터 있었으나 풀로서 길을 감추었다하여 노은방(路隱坊)이란 말도 있다.

냉천리

냉천은 마을 동쪽 500여m 지점에 약 20평정도의 찬물이 솟는 샘이 있다. 여름에 땀띠가 없어질 정도로 차고 약효가 있었다. 지금은 거의 매몰되고 약 2평 정도의 샘이 있을 뿐이다, 中보는 냉천 서쪽에 있는 마을이며 보가 있어서 생긴 이름이다. 구 마을 사이에 동내산이 있다. 거목(巨木)들이 있어서 이 나무들이 마을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나무들을 신목(神木)으로 추앙하고 적극 보호하고 있다.

대곡리

대배(大拜)와 유곡(幽谷)이 합해서 大谷이 되었다. 약400여년전에 개척된 마을이라 한다. 골짜기가 크고 길며 깊다고 하여 유곡(幽谷)이라 칭하다가 대곡이라고 했다하며 마을 입구에 쌍효각(雙孝閣)이 있다. 대배(大拜)는 마을 앞에 언덕이 있는데 언덕의 바위가 큰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하여 大拜라 했다 한다. 大拜윗마을에 암자가 있으며 그 암자에 기원하면 소원이 성취된다 한다.

대미리

대리(大里)와 도미(都美)가 합하여 된 마을이며 대리(大里)는 약 500여년 전에 영천 이씨(李氏)가 개척했다고 전한다. 옛날에 고현면 소재지라고 전해오고 있다. 도미(都美)는 미리(美里) 또는 귀귀리(歸貴里) 또는 호미리(虎尾里)라고 하며 통일신라시대에 합천이씨 (陜川李氏)가 이 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여자가 누워 있는듯 하며 남향이라서 따뜻하여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귀한 곳에 왔다는 뜻으로 귀귀리(歸貴里)라 했다 한다. 또 지형을 다시 볼때 호랑이 꼬리 부분이 이 마을 모습과 같다하여 호미리(虎尾里)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씨가 비단같다 하여 미리(美里)라고도 한다.

덕성리

대리(大里)와 도미(都美)가 합하여 된 마을이며 대리(大里)는 약 500여년 전에 영천 이씨(李氏)가 개척했다고 전한다. 옛날에 고현면 소재지라고 전해오고 있다. 도미(都美)는 미리(美里) 또는 귀귀리(歸貴里) 또는 호미리(虎尾里)라고 하며 통일신라시대에 합천이씨 (陜川李氏)가 이 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골짜기의 모습이 마치 여자가 누워 있는듯 하며 남향이라서 따뜻하여 포근한 느낌을 준다. 귀한 곳에 왔다는 뜻으로 귀귀리(歸貴里)라 했다 한다. 또 지형을 다시 볼때 호랑이 꼬리 부분이 이 마을 모습과 같다하여 호미리(虎尾里)라 부르기도 한다. 또는 동네 사람들의 마음씨가 비단같다 하여 미리(美里)라고도 한다.예부터 있었던 마을 이름으로 임진왜란때에 월성이씨가 왜병란(倭兵亂)을 피하여 이곳에 와 정착했다 하며 '덕시', '덕재', '덕성(德城)'이라 한다. 언덕 위에 있으며 경산시에서 영천시로 들어오는 경계부근에 있다. 1987. 1. 1일 경산시 와촌면 계당리의 20여가구가 이 마을로 편입되었다.

봉죽리

죽방(竹坊), 봉산(鳳山), 곡촌(谷村)이 합하여 된 마을이다. 1720년대에 해주 吳氏가 개척한 곡촌(谷村)이 있으며 골짜기와 골짜기 사이 곡촌 못이 있고 그 아래에 모여산다. 현재 10여가구가 살고 있다. 죽방(竹坊)은 김해 김씨가 이 마을을 개척하여 대나무를 많이 심어 전 마을이 대나무 숲으로 둘려 싸였다 하여 竹坊이라 했다 한다. 대나무가 많음으로 동쪽에 죽림사(竹林寺)가 있다. (신라시대의 고찰) 새터는 거여면이였을 때 새동내가 이루어 졌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삼호리

삼수(三水), 가라(加羅), 용호(龍湖)의 3개 마을이 합한 것이다. 약 300여년전에 생긴 강정(江亭)과 가라골(駕羅谷) 마을을 합하여 삼호리가 되었고 약 100여년전 홍수로 3개의 沼가 생겼다. 江亭은 약350년전 마을 앞을 흐르는 강가에 큰 정자가 있었는데 이 마을에 길흉사가 있을때 이 정자에서 소원을 빌었다고 한다. 이 마을 중앙에 위치한 창주서원(蒼州 書院)에는 충정공(忠貞公) 정재 조상치(靜齋 曺尙治)선생의 신도비가 서 있다. 선생은 조선 世宗 1년 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나 世祖가 왕위 찬탈을 한 후에는 벼슬을 버리고 이 마을에 와 살다가 他界하셨다. 암마, 가라골, 가라곡(駕羅谷)은 조선시대에 생겼으며 마을의 모양이 말모양으로 생기고 비단을 널어 말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三星, 三水는 三星山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야무산(野無山) 숙재는 수키와장으로 못을 막았다 하여 숙재라 했다.

석섬리

입석(立石)과 섬촌을 말한다. 마을 개척당시 동리앞에 선돌이 4개 있다하여 立石이라고 칭한 곳과 오천 정씨가 개척한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있는 섬촌이라 칭한 마을을 말한다. 씨족사회때 천제(天祭)를 지냈던 곳이라고 전해오는 立石이 지금도 3개 있다. 양 마을의 형성연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선돌을 볼때 고대로부터 인류가 정착하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또 죽으면 그속에 매장(埋葬)했다는 근거를 찾아 볼 뿐이다.

성천리

덕천(德川), 덕리(德里), 대성(大成)이 합하여 된 마을이다. 덕천은 가장 큰 마을이며 한양 조씨(趙氏)가 가장 많이 살고 있고 원당(元堂)은 조선시대에 관인이나 또는 벼슬아치들이 쉬어가는 원(院)이 있었다고 하여 원당(元堂)골이라 불리어지고 있다. 우버리(于伐)는 마을 앞에 웅덩이 못을 막고부터 벙어리가 많이 났다고 한다. 또 마을간에 싸움이 있을시 소꼬리에 불을 붙여 진격하여 전쟁에 승리 하였다 하여 우벌이라고 한다. 샘골과 웃물 및 아랫물등의 자연부락이 있다. 아랫물은 약 100년전에 생긴 마을이다. 약 260여년전 "김부민"이라는 사람이 마을을 개척했다 하며 당시 큰 "沼"와 "江"이 있었으므로 덕천(德川)이라고 했으며 또 대성전(大成殿)이라는 전(殿)이 있었고 마을앞에 흐르는 내(川)을 따서 성천(成川)이라 칭한다.

신대리

옛날에는 현재의 마을뒤 야산밑에 "비선동" 이라는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으나, 서기 1600년경 연안 차씨가 현재의 마을로 이주할 당시에 새집을 지었다하여 신길리(新吉里)라 부르다가 신대리 (新垈里)라 했다. 땅섬은 옛날 이 곳을 흐르는 금호강이 깊었는데 흙이 퇴적되어 섬을 이루었다 한다. 새터, 신대, 용호동은 구한말년까지는 들이었다. 앞들 남쪽에 유명한 송정보가 있으며 북쪽에 삼호로 가는 신당고개가 있다.

신월리

月下와 新興의 一部가 합하여 된 마을이다. 금꾸디 : "금구덩이" 라는 뜻인듯 하다. 일제때에 금을 캐려고 개발한 곳으로 부근에 금의 산출이 많았다. 일제때는 잘 사는 곳이었다. 그러나 해방후는 가난한 마을이 되어버려 다시 좋은 마을을 만들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붉은디, 붉은디기 : 붉은 흙이 산출됨으로 옹기를 구웠다. 옛날에는 洞祭를 지냈다. 월하리(月下里) : 으뜸되는 마을로 뒷산이 반월(半月)처럼 생겼다. 새각단은 새로 생긴 마을이고 큰각단은 큰마을이며 중간각단은 중간에 있다. 마을이 생긴것은 아주 옛날이다. 월하리 고갯마루에 사당이 있어 당고개라 하던것이 지금은 이 고개를 넘어 갈때 땀을 많이 흘리는 고개라 하여 "땀고개" 또는 "땅고개"라 한다. 대구-영천 사이의 도로를 개설할때 경사가 높은 산지를 깎아 만들었는데 그때 생겼다고 땅꼭이라 칭한것이 지금은 "땅고개"가 되었다고 한다. 영천시 서부동과 금호읍과의 경계지역에 있는 고개다. 이 마을을 싸고 있는 숲으로 팔공산 도둑봉에서 보이지 않도록 소나무와 대나무를 심어 숲이 만들어졌다고 전해지며 현재 대나무는 없어지고 소나무만 있다. 신월지 못둑 밑에 탑이 있어 탑못이라 하며 신라 대찰이었으나 지금은 못이 되었다.

약남리

약남은 가야(佳野)와 도촌(島村)으로 되었다. 술남, 수남은 마을에서 중심되는 곳인데 옛날 칠백면(七百面) 사무소가 있었던 곳이다. 옛날 이곳에 입주한 사람들은 어디를 가서 파도 물이 나오므로 "水" 자와, 위치가 南이라 "水南"이라 했다. 현재 용궁 전씨(龍宮 全氏)가 살고 있는데 임진왜란때 영천복성에 功이 많은 전삼달(全三達)장군의 자손들이다. 장군의 어서각(御書閣)이 있다. 섬촌(島村)은 섬모양으로 생겼으며 청석비리(靑石碑里) 또는 청석리는 영천군수였던 이학위(李鶴委)가 흉년이 들어서 기아에 허덕이는 군민에게 양식을 주었더니 면민들이 군수의 송덕비를 세웠다. 碑가 있기에 청석비라 했다. 가야(佳野)는 약 400여년전 유씨(兪氏)인 농부가 산야초를 베고 논과 밭을 일구어 살았는데 수원이 좋고 땅이 기름져서 농사 짓기에 편리한 곳이라 佳野라 했다 한다.

어은리

어은(魚隱)과 옛 신전(新田)일부가 합해진 곳이며 어은동, 어븐동이라고 한다. 마을 앞에 있는 강에 고기가 잘 번식한다. 예부터 고기가 놀란다고 하여 농악놀이를 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약300여년전 성균관생원 서열(成均館生員 徐悅)이 마을을 설립하여 도장곡(道藏谷)이라 했으나 그후 마을 밑에 있는 큰沼에 "이심이"가 살고 있기에 어은이라 했다. 새마실은 1959년도 사라호 태풍후에 생긴 마을로서 주로 사과농사를 하고 있다.

오계리

오계(五溪)는 오종리(五宗里)와 단계(丹溪)로 되었다. 단계, 또는 사교(沙橋) 또는 사근다리라고도 한다. 가장 큰 마을이며 郭, 曺, 崔氏가 주로 살고 있으며 을사사화(乙巳士福) 때 경재 곽순(警齋 郭洵)선생이 옥살이 할 때 마을 안 개울이 붉게 흘렀다 하여 丹溪라고 했다 한다. 丹溪라 부르기 전에는 시장이 있었다. 오종리(五宗里)는 宗里라고도 한다. 새터북쪽에 있는 마을로 60가구가 살고 있다. 조선 正祖때 병마절도사를 지낸 조학신(曺學臣)선생이 入鄕한 곳이며 마을 안쪽 언덕을 울창한 송림이 마을을 감싸고 있다. 줄잡아도 한아름되는 소나무가 250本은 될것이다. 조학신선생께서 직접 심으신 송림(松林)이다. 채약산 기슭에서 시작하여 5개의 민둥산이 서북쪽으로 연이어져 있으며 그 마지막 다섯째의 민둥산을 끼고 아래에 마을이 생겼으니 오종동(五宗洞)이라 한다. 오계리는 일제때 행정구역 개편때 오종동의 "五"자와 단계(丹溪)의 "溪"자를 따서 오계리라 한데서 연유되었다.

원기리

원기(元基)는 원방(元方), 안기(安基), 마단(麻丹)으로 되었다. "元"자와 "基"자를 합하여 "元基"라 하게 되었다. 섬들(島坪) :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였으며 지형이 섬처럼 생겼다. 마단(麻丹) : 조선 中宗때 경재 곽순(警齋 郭珣)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대사간(大司諫)에 재직하다가 을미사화(乙己士禍)를 당하여 옥사할 때 "죽으면 고향의 대마(大麻)가 붉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1545년 9월 15일 마단의 삼발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3일간에 계속해서 색이 변했다. 마을 사람들은 凶兆(흉조)라하여 놀랐는데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四諫院, 司諫으로 재임하던 경재 곽순선생의 反樞(객지에서 죽은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옴)행렬이 서울서 도착하자 비로소 그 凶兆를 알게 되었다. 그후 경재 선생을 사모한 나머지 마을을 麻丹이라 했다 한다. 元方은 중심되는 마을로서 본거지라 한다. 四方이 넓은 들이고 들 가운데 위치한다. 학당골 서당(學堂谷 書堂)이 있었던 곳이다.

원제리

원기(元基)는 원방(元方), 안기(安基), 마단(麻丹)으로 되었다. "元"자와 "基"자를 합하여 "元基"라 하게 되었다. 섬들(島坪) : 사방이 야산으로 둘러싸였으며 지형이 섬처럼 생겼다. 마단(麻丹) : 조선 中宗때 경재 곽순(警齋 郭珣)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대사간(大司諫)에 재직하다가 을미사화(乙己士禍)를 당하여 옥사할 때 "죽으면 고향의 대마(大麻)가 붉을 것이다"고 하였다 한다. 1545년 9월 15일 마단의 삼발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3일간에 계속해서 색이 변했다. 마을 사람들은 凶兆(흉조)라하여 놀랐는데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四諫院, 司諫으로 재임하던 경재 곽순선생의 反樞(객지에서 죽은 시체를 고향으로 옮겨옴)행렬이 서울서 도착하자 비로소 그 凶兆를 알게 되었다. 그후 경재 선생을 사모한 나머지 마을을 麻丹이라 했다 한다. 元方은 중심되는 마을로서 본거지라 한다. 四方이 넓은 들이고 들 가운데 위치한다. 학당골 서당(學堂谷 書堂)이 있었던 곳이다.

호남리

호남리(湖南里)는 신촌(新村)과 신전(新田)의 일부가 합했다. 이곳은 원래 칠백면(七百面)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금호면에 속하였다. 약 350여년전 염씨(廉氏)가 개척했으며 임란시에는 군수가 이 곳으로 군민을 피난시켰다고 전해오고 있다. 금호의 남쪽에 위치한다하여 호남이라 했다한다. 신전에는 옛날에 군량미창고가 있었기에 사창이라고 한다. 지금은 그 곳에 느티나무가 서 있다. 입구에 있는 산에 옛날 마을의 행운(幸運)을 기원하는 동제를 지냈다. 신전(新田)에는 김녕 김씨가 처음 살았으나 지금은 한가구도 없으며 파평 윤씨, 경주 김씨, 경주 최씨, 창녕 조씨등이 살고 있다.

황정리

조선시대인 1610년대부터 영천군 거여면 황정이라 했다가 그대로 행정명칭이 되었으며 뒷산 이름이 유봉산이다. 봉(鳳)과 황(凰)과는 자웅관계(雌雄關係)이므로 황정이라 했다. 거여는 옛날 소재지였으며 "울타리 없는 마을"이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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